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빈 김씨 (문단 편집) === 불교에 대한 믿음 === 당대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신빈 김씨도 [[불교]]에 대한 믿음이 깊었다. 특히 아예 머리를 깎고 [[비구니]]가 되어 살았는데, 세종의 상중에 막내 아들 담양군이 12세의 나이로 요절하는 바람에 충격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.[* 당시에는 후궁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. [[태종(조선)|태종]]의 후궁 [[의빈 권씨]]와 [[신빈 신씨]]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, 이때 세종의 허락 없이 하는 머리를 깎아서 논란이 일었다. ] 신빈 김씨가 요절한 아들을 위하여 불경을 인쇄하려고 하자, [[문종(조선)|문종]]은 쌀 500석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내주어 국고를 비웠다는 비판을 들었다.[* 문종은 비록 [[이복형제|이복동생]]이지만 정혼까지 한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죽은 담양군을 애틋하게 여겼기 때문이다. 또한, 문종은 담양군의 정혼자에게 상복을 입혀 담양군의 정실 부인으로 확정지으려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적도 있다. ] 오죽하면 신빈 김씨의 차남 [[의창군(1428)|의창군]]이 어머니가 머리를 기르게 해달라고 청하자, [[단종(조선)|단종]]이 의정부와 논의하여 머리를 기르라고 명하였다. 하지만 신빈 김씨는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.[* 단종실록 3권, 단종 즉위년 9월 12일 신축 1번째기사. [[http://sillok.history.go.kr/id/kfa_10009012_001|#]] ] 이 밖에도 김수온이 쓴 〈묘적사중창기(妙寂寺重創記)〉에 따르면, 밀성군이 어머니를 오래 모시지 못한 것을 슬퍼하여 묘적사에 후하게 시주하고 신빈 김씨의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.[*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 묘적사다. 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